기술의 파국적 위험을 '사기극'으로 폄훼하는 선동은 종말론 비판을 가장해 초거대 자본의 독점과 알고리즘 권력에 대한 공적 통제를 무력화하려는 정치·자본 복합체의 기만적 결탁이다.

프레임의 왜곡과 규제 실종의 본질

9월 15일 전해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발언은 인공지능 정책 공론장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인공지능(AI) 개발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각계의 경고를 '사기극(HOAX)'이라 일축하며 미 의회의 규제 입법을 교착 상태로 몰아넣었다. 제도권 언론은 이를 거친 정치인의 돌출 발언이나 정쟁, 혹은 공상과학적 종말론과 실용적 개발론의 대립으로 축소해 중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도 프레임은 사태의 본질을 은폐한다. '인류 멸망'이라는 극단적이고 추상적인 수사를 빌미 삼아 위험 담론 전체를 조롱함으로써, 현재 진행 중인 노동 시장 교란, 저작권 무단 침해, 알고리즘 편향 등 실질적 사회적 비용에 대한 민주적 통제 시도를 통째로 무력화하려는 책략이기 때문이다.

안보의 방패 뒤에서 은폐되는 자본의 독점

이러한 탈규제 선동의 배후에는 초거대 기술 자본과 국가주의적 패권 논리의 노골적인 유착이 자리 잡고 있다. 9월 16일 전해진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의 미·중 정상 국빈 만찬 참석 계획은 기술 권력이 국가 주권의 최상층부와 어떻게 공생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빅테크 기업들은 '중국과의 기술 경쟁에서 뒤처지면 국가 안보가 위태로워진다'는 공포를 무기 삼아 규제 입법을 저지해 왔다. 그 결과 기술 혁신으로 발생하는 천문학적 이윤과 시장 지배력은 소수 반도체·플랫폼 독점 기업의 금고로 귀속되지만, 알고리즘 편향과 전력망 과부하, 고용 축소의 위험은 평범한 시민 사회로 외주화된다. 국가 안보라는 명분은 기술 독점 기업들이 공적 책무를 면탈받는 가장 손쉬운 방패막이가 되었다.

죄수의 딜레마에 갇힌 지정학적 알리바이

이 사안을 둘러싼 '혁신 대 규제'의 이분법이나 양비론은 현실을 호도하는 게으른 지적 나태다. 규제가 혁신의 발목을 잡는다는 주장과 규제만이 능사라는 주장을 기계적으로 절충하는 순간, 글로벌 지정학의 죄수의 딜레마는 심화된다. 같은 날인 9월 16일, 유럽연합(EU)이 15세 미만 아동에 대한 챗봇 규제 방침을 세우며 AI를 기후변화에 이은 '두 번째 티핑 포인트'로 규정한 것은 미국의 폭주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러나 미·중 양국이 인공지능 안전을 제로섬 군사·경제 경쟁의 도구로 취급하는 한, 어느 한쪽도 속도 조절 페달을 밟지 못하는 파멸적 치킨게임은 멈추지 않는다. 규제의 공백은 기술 발전의 필연이 아니라, 패권을 잃을지 모른다는 맹목적 공포를 빌미로 윤리적 안전장치를 걷어찬 국가 권력의 의도적 방조다.

민주적 통제의 회복과 주체별 책임의 경계

공론장이 던져야 할 질문은 'AI가 인류를 멸망시킬 것인가'라는 가공의 공포가 아니라, '통제되지 않는 알고리즘 자본주의의 대가를 지금 누가 치르고 있는가'이다. 파국론을 조롱하며 공적 개입을 거부하는 자들은 기술이 초래한 현실의 사회적 비용을 미래 세대에 떠넘기고 있을 뿐이다. 속도전의 맹목에서 벗어나 공적 책임의 경계를 명확히 세워야 한다.

미국 의회는 포퓰리즘적 선동에 흔들리지 말고 플랫폼 독점 방지와 알고리즘 투명성을 강제할 입법을 즉시 재개해야 한다. 거대 기술 기업들은 안보의 그늘 뒤에 숨어 규제를 회피하는 행태를 멈추고 위험 평가 체계를 외부에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한국 정부 역시 미·중의 안보 프레임에 휩쓸리지 않고, 독점의 폐해를 방지하며 시민의 데이터 주권을 지키는 제도적 안전망을 서둘러 구축해야 한다. 기술 권력의 자의적 지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시장의 선의가 아니라 주권자의 단호한 민주적 규범뿐이다.

더 생각해봐야 할 이야기

시사 이슈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심층 토론 질문 (Thinking Points)

  1. 1

    기술 패권 경쟁과 공적 규제의 양립 가능성**: 미·중 간 기술 냉전 속에서 개별 국가가 추진하는 안전 규제는 진정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자해적 행위인가, 아니면 지속 가능한 기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필수 안전장치인가?

  2. 2

    위험 프레이밍의 정치경제학**: '인류 멸망' 같은 극단적 SF 위협 담론이 과도하게 부각될 때, 정작 일자리 파괴, 저작권 침해, 알고리즘 편향 등 당면한 현실적 피해에 대한 공론장의 감시와 입법이 왜곡되거나 무력화되는 구조적 이유는 무엇인가?

  3. 3

    글로벌 규제 불균형과 디지털 주권**: 유럽연합(EU)의 선제적 규제 실험이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상업적 관행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가, 아니면 규제 완화국으로의 자본 유출과 산업 경쟁력 약화라는 역풍만을 초래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