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 정부가 내년도 에너지 연구개발(R&D) 예산을 역대 최고치로 편성하며 기술 주도권 방어에 나섰다. 전 세계를 휩쓰는 인공지능 전환과 첨단 반도체 증설 경쟁의 진정한 병목이 안정적인 대규모 전력 공급에 있다는 현실을 직시한 조치다. 첨단 기술 패권은 고도화된 알고리즘만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데이터센터와 생산 공장을 24시간 가동할 무탄소 전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에너지 연구개발 예산의 전례 없는 확충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생존을 지탱할 불가피한 승부수다.

정부는 이번 예산안에서 에너지 R&D 재정을 48% 증액하고 원자력 분야에 최대 규모 투자를 단행하기로 했다. 특히 ()에 자원을 집중하는 한편 인공태양으로 불리는 핵융합 연구 예산을 153%나 늘려 차세대 기저부하 기술을 선점하겠다는 명확한 방향을 제시했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전력 소비를 감당하면서도 글로벌 탄소 배출 규제를 충족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풀기 위해 검증된 원전 기술과 미래 에너지원에 집중한 셈이다. 재정 여력이 빠듯한 상황에서도 미래 전력원의 원천 기술을 확보하려는 정책적 우선순위 설정은 정당성을 지닌다.

> 미래 에너지 기술의 패권은 실험실 안의 발전 효율이 아니라 생산된 전력을 산업 거점으로 연결하는 국가 전력망 혁신에서 완성된다.

하지만 막대한 재정 투입이 곧바로 국가 산업 경쟁력의 도약으로 치환되지는 않는다. 차세대 원전과 핵융합 분야에서 독보적 기술을 축적하더라도, 생산된 전기를 산업 단지로 수송할 송배전망 인프라가 턱없이 지체된다면 막대한 연구 성과는 계통에 닿지 못한 채 고립되고 만다. 아울러 새로운 원자로 노형과 첨단 에너지 기술을 신속히 검증할 인허가 규제 체계가 낡은 틀에 머문다면 기술의 경제성 확보는 요원해진다. 장기 연구에 매몰되어 민간 기업과의 실증 사업 및 상용화 경로를 유기적으로 구축하지 못한다면 투입된 혈세는 사장될 위험이 크다.

정부는 단순한 예산 증액 발표에 안주하지 말고 R&D 착수 단계부터 상용화와 전력망 수용성을 포괄하는 입체적 로드맵을 가동해야 한다. 과 차세대 에너지원의 조기 실증을 가로막는 규제 족쇄를 과감히 풀고, 국가 기간 전력망 건설을 위한 제도적 정비를 서둘러야 마땅하다. 첨단 산업의 명운을 쥔 전력 확보 경쟁은 연구실의 성과 보고서가 아니라 공장으로 전력이 흘러 들어가는 완결성에서 판가름 난다. 과학기술 역량과 국가 송배전망 투자를 한 몸으로 묶는 정책 컨트롤타워의 결단이 뒤따라야 한다.

더 생각해봐야 할 이야기

시사 이슈를 깊이 이해하기 위한 심층 토론 질문 (Thinking Points)

  1. 1

    인공지능과 첨단 반도체 수요가 폭증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전력 확보와 탄소중립 목표는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고려할 관점
    화석연료 감축의 당위성과 무탄소 기저부하 전원으로서 원자력·의 경제성, 그리고 간헐성을 지닌 재생에너지와의 최적 전력망 믹스 설계.
  2. 2

    국가 주도의 대규모 에너지 R&D 예산 투입이 민간 상용화 성공으로 이어지기 위해 필요한 핵심 제도적 요건은 무엇인가?

    고려할 관점
    정부 주도 실증 사업의 규제 샌드박스 적용 범위, 민간 기업의 위험 분담 및 투자 유인 체계, 차세대 원전 인허가 패스트트랙 구축.
  3. 3

    차세대 발전 기술 도입 및 대규모 전력망 확충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역사회 수용성 갈등을 해소할 합리적 거버넌스는 무엇인가?

    고려할 관점
    전력 생산 지역과 수도권 첨단 산단 간의 전력 수급 불균형, 송전선로 경과지 보상 체계의 현실화, 사회적 공론화 절차의 실효성.